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카테리나 2세 (문단 편집) ==== 즉위 ==== 결혼해서 열심히 [[러시아어]]와 [[문화]]를 공부하고, 종교까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열성적으로 왕족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아내와 달리 [[표트르 3세]]는 [[독일]]풍과 개신교만을 계속 고집했기에 러시아 내부에서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대형 사고를 쳐버린다. 무시무시한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였던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을 다 몰아붙였는데도 [[7년전쟁]]에서 빠진 것. 이게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이 굉장한 뻘짓은 러시아 귀족들의 분노를 사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선황 옐리자베타 여제와 라주모프스키 사이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타라카노바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명에 의해 평생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 후에 유럽 사교계를 떠돌던 한 고급 창녀가 자신이 타라카노바 황녀라고 사기를 치다가 역시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을 받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에 의해 납치되어 러시아로 잡혀와 감옥에서 옥사한 일도 있었는데 19세기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https://m.blog.naver.com/ykwun/7007984619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